믿음과 신뢰로 시작하여 고객만족으로 모든일을 마무리 합니다. "
[구미홈페이지제작 구미웹] '윤동주의 삶'
작성일 | 2018-11-13 11:24:59 | 조회수 | 446 |
---|---|---|---|
윤동주의 삶
1917.12.30.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천엫서 아버지 운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출생. 아명 해환
1925.4.4. 명동 소학교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 송몽규, 당숙 연영서, 외사촌 김정우, 문익환 등이 있었다.
1927. 명동소학교 5학년 때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등사 잡지를 마든다.
1931.3.15. 명동소학교 졸업, 학교에서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한다. 명동소학교 졸업 후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조금 떨어지 곳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화룡 헌립 제일소학교 고등과에 편입해 1년간수학.
1932.4. 용정 기독교계 은진중학교에 송뭉규, 문익환과 입학.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이곳으로 통학하는 운동주를 위해가족 모두가 용정으로 이사한다.
1934.12.24. [초한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등 3편의 시를 쓰다. 이는 오늘날 찾압볼 수 있는 윤동주의 최초 작품이며 이때부터 자기 시 작품에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1935.9.1.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
1935.10. 숭실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내던 [숭실활천] 제 15호에 <공상>이 실려 그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
1936.3. 숭실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해 자퇴하고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공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편입.
1936.11.-12.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에 동시<병아리>(11월호)와 <빗자루>(12월호)를 윤동주란 이름으로 발표.
1937.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지도>(1월호), <무얼먹고사나>(3월호)를 윤동주란 이름으로, <거짓부리>(10월호)를 윤동주란 이름으로 각기 발표. 동주라는 필명은 이 때 처음 사용한다.
1937.8. 1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 [백석시집:사슴]을 구할 길이 없자 필사해 소장한다.
1937.9. 진로 문제로 문학을 희망하는 윤동주와 의학을 선택하라는 아버지 윤영석이 갈등하나 할아버지 윤하연의 권유로 아버지가 양보해 문학에 진학하기로 한다. <영랑시집>을 정독하다.
1938.2.17.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1938.4.9.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기숙사 생활 시작. 송몽규도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운다.
1939.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23), 시 <유언>(2.6),<아우의 인상화>(10.17)를 윤동주와 윤주라는 이름으로 발표.
1939.3. 동시 <산울림>을 [소년] 3월호에 윤동주란 이름으로 발표. 새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하동 학생 정병욱(1922-1982)을 알게 되어 친해진다. 정병욱과 함께 이화여전 구내 형성교회에 다니며 영어 성서반에 참석한다. 이 무렵 릴케, 발렐리, 지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여, 프랑스어를 독습한다.
1941.5.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에서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기 시작. 김송과는 하숙생이 되며서 우연히 알게 된다.
1941.6.5.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하는 [문우]에 <우물속의>,<새로운 길>을 발표.
1941.9. 요시찰인 김송과 학생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주목이 심해 그곳을 나와 북아현동의 전문 하숙집으로 들어가다. 서정주의 [화사집]을 즐겨읽다.
1941.12.27.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 졸업.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당시 흉흉한 세상을 걱정한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시집을 3부 작성해 한 부는 자신이 갖고, 이양하 서생과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한다. 본래 이 자선시집의 제목은 '병원'이었으나 <서시>를 쓴 후 바꾸었다. '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윤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히라누마'로 창씨개명.
1942.1.24.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시 <참회록>을 쓰다.
1942.4.2. 도코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 송몽규는 도쿄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한다.
1942.4.-6. <쉽게 씌어진 時>등 이때 쓴 시 5편을 서울의 친구에게 보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이다. 여름방학에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가다.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다.
1942.10.1.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선과에 편입.
1943.7.10. 송몽규가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된다.
1943.7.14. 교향에 가려고 준비하던 윤동주도 송뭉과와 같은 혐의로 검거되고 많은 책과 작품, 일기가 압수된다. 당숙 윤영춘이 교토로 운동주를 면회하러 가서 윤동주가 일본 형사와 대좌해 우리말 작품과 일기를 일어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1944.3.31. 교토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다.
1944.4.13. 송몽규 역시 같은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후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1945.2.16.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별이 되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윤동주 에서-
우리나라를 생각하다가 윤동주시인이 생각나서 삶을 알아봤습니다. '동주'라는 영화를 봤었는데 형무소에서 별이 되다라는 문구에서 어떤 마지막 이었는지가 생각이 나네요. 우리나라를 지키려고 힘썼던 많은 사람들을 잊지말고 우리나라를 사랑해야 겠어요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저희 구미홈페이지제작 구미웹은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구미웹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최고의 퀄리티를 약속합니다. Trust And Belief by GUMIWEB
구미홈페이지제작업체No.1 구미웹
Patience is bitter, but its fruit is sweet.
대구홈페이지제작 #구미홈페이지제작업체
|
이전글 | [구미홈페이지제작 구미웹] 수박바, 돼지바 ^^ |
---|---|
다음글 | [구미홈페이지제작 구미웹] 갓바위 맛집 솔매기식당 |
댓글0